울릉도 할아버지와 내 친구의 소중한 행복 (박종갑 명예교수)

울릉도 할아버지와 내 친구의 소중한 행복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박종갑 명예교수 (국어국문학과)    한 20년 전쯤,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‘울릉도에 대한 종합적 연구’를 추진하였다. 그 때 나를 포함한 국문과의 몇몇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이 연구 프로젝트의 한 영역인 울릉도 방언연구를 위해 며칠씩 수차례 울릉도에 체류하면서 방언조사를 한 적이 있다.    적절한 제보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돌아다니다가 만난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에게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있다며 어떤 무덤 군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. 그렇게 크지 않은 무덤들이 여럿 있는데, 하나같이 무덤의 정면에 사람이 하나 정도 겨우 들어가 앉을 만한 얕은 굴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고, 그 앞에는 밥그릇 같은 식기들이 몇 개씩 나뒹굴고 있었다.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정말 대단한 문화유적을 소개한다는 듯이, 의기양양하게, 이게 바로 울릉도에만 있는 ‘고려장’의 흔적이라고 했다. 늙은 부모를 이 굴 속에 들여다 놓고는 간혹 밥을 갖다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. 우리는 그 때 워낙 갑자기 그런 희한한 형상의 무덤과 얘기를 접한 나머지, 고려장이란 것이 일종의 전설에 불과한 것인데도, 지식인(?)답게 대처를 하지 못했다. ‘어 그 참 이상한데’ 하면서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끌려 다녔다.    며칠 뒤 같은 연구 프로젝트의 한 영역인 울릉도 역사유적 조사를 위해 국사과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들어왔다. 같은 숙소에 묵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그 할아버지 얘기를 하니, 당시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이던 국사과 김윤곤 교수님이 박장대소하셨다. 그건 도굴의 흔적으로, 도굴꾼들이 무덤에 굴을 파서 돈 될 만한 것은 가져가고 나머지...

한국 정신의 못자리, 영주 부석사와 순흥 소수서원 (김정숙 명예교수)

  한국 정신의 못자리, 영주 부석사와 순흥 소수서원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  김 정 숙 명예교수 (인문대학 역사학과) 태백산맥으로 잇는 경북 영주와 충북 제천의 신선 세계 대학시절 우리 과는 전체가 참여하는 봄 정기답사가 있고, 가을에는 그룹답사를 했 다. 그리고 두 답사의 결과를 종강 직전에 ‘사진 및 탁본 전시회’로 정리했다. 1975년 2학년 때 우리 그룹은 영주 일대를 답사했다. 여대생 여덟 명이 서울에서 기차, 버스 를 갈아타고 굽이굽이 돌아 부석사 앞마을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. 예약 도 하지 못한 우리는 한 집을 두드리며 숙박을 청했다. 주인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 니, 우리보고 방을 청소하고 불을 때면 그 사이에 저녁을 지어주겠다고 했다. 우리는 감지덕지, 나누어서 방청소와 아궁이불 팀으로 나누었다. 불 땐다는 일은 그냥 장작에 불붙이면 되는 게 아니었다. 연기가 얼마나 나던지 번 갈아 울면서 뛰쳐 나왔다. 그 난리를 치르며 저녁을 먹고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 다. 한없이 긴 흙길에 코스모스가 양옆에 가득 피어 있었다. 달빛에 가지각색의 코스 모스가 흔들리고 절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고 끝없이 걸었다. 그리고 밤에 들어와서 도 수다는 계속되었다. 지친 친구들은 왜 자지도 않냐며, “여우가 물어가라”고 소리치 기도 했다. 그래, 여우가 나올 것 같은 시골이었다. 아침이 왔다. 아침에 밖에 나가서 더 놀랐다. 나는 사과가 나무에 달린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. 당시 사과 저금통이라는 것이 있었는데, 꼭 그만한 크기의 사과가 나뭇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. 과수원 주인을 찾아서 사과를 한 소쿠 리 흥정했다. 우리는 사과를 먹고 싶은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사과를 직접 따고 싶었다. 그러나 주인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. 따다가 잘못하여 눈을 건드리면 다음 해에 사 과가 열리지 않는단...

조선 멸망의 원인 (김영문 명예교수)

조선 멸망의 원인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김 영 문 명예교수 ( 정치행정대학 , 정치외교학과 )   Ⅰ . 문제 제기 1910 년 8 월 22 일 서울 거리 곳곳에 일본 헌병들이 감시하고 있는 가운데 창덕궁 흥복헌에서 조선 왕실의 숨통을 끊는 , 비극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.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석했으며 , 회의는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끝났다 . 토론 없이 한일합병조약은 서명되었다 . 조약의 내용은 단 두 구절이었다 . 제 1 조 , 대한제국 황제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 . 제 2 조 , 일본국 황제는 이 양여를 수락하고 대한제국 전부를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.  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 ( 國恥日 ) 이라 부른다 . 조선의 왕과 왕족 그리고 대신들은 나라를 일본에 바쳤다 . 어떻게 518 년이나 유지된 나라가 자국의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평화적인 왕권교체나 , 쿠데타나 혁명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, 한일합병조약이라는 문서 하나로 무너질 수 있었는지 ? 이 문서 하나로 인해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지키면서 살아온 한민족은 자유를 잃고 다른 나라의 종이 되며 , 그 터전마저 하루아침에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미증유의 참변이 불 보듯 한데도 어떻게 선조 때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대규모 전쟁을 막아낸 조선이 총 한 방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하고 국권을 이양할 수 있었는지 ?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 (Gregory Henderson) 은 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’ 에서 " 그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그토록 훌륭한 유산을 가진 한국이 그렇게 쉽게 멸망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" 라고 표현했다 .  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 ...